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1906 ~ 1932 (취리히 - 베를린) === 아인슈타인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괄목할 업적은 [[일반 상대성 이론]], 즉 새로운 [[중력]] 이론이다.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1907년부터 1915년까지 거의 9년을 소비했으며,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907년 발견한 등가 원리는 훗날 아인슈타인 스스로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이디어를 크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곧 양자 문제에 눈을 돌렸다. 1911년 10월 ~ 11월에는 복사와 [[양자]] 문제를 중심으로 첫번째 [[솔베이 회의]]가 열렸다. 아인슈타인은 이곳에서 로렌츠, [[마리 퀴리]], [[어니스트 러더퍼드]]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1911년 4월 [[프라하]]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자 밀레바와 함께 프라하로 이동하였고, 양자 문제를 뒤로 하고 빛의 굴절, 정적 중력장 이론 등 상대성 이론 관련 논문을 연달아 물리학 연보에 게재하였다.[[https://utf.mff.cuni.cz/Relativity/Einstein.htm|#]] 1912년에는 드디어 중력이 시간과 공간의 곡률과 관련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어냈다. 그러나 그는 공간의 기하학을 기술하는 수학을 알지 못했고, 8월 모교인 취리히 연방 공대(EHT)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면서 취리히로 돌아간 직후 동료 수학자인 그로스만(Grossmann)의 도움을 받았다. 이 때 그로스만이 소개해준 수학이 바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토대가 되는 미분 기하학(절대 미분학)으로, 1901년 리치, 레비치비타가 집대성했기에 상당히 최신 수학에 속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수학을 익히는 데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1912년 4월에는 친척인 엘사 로웬탈(Elsa Lowenthal)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1913년 7월 그는 [[막스 플랑크]]의 추천을 받아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Prussian Academiy of Sciences)의 회원이 되었고, 학생 교육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14년 4월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매우 혼란스러운 환경에 놓이게 되었으며, 부인 밀레바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별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중력 이론의 완성에 완전히 전념하였고, 몇몇 물리학자(노르드스트룀, 아브라함 등)들과 수학자(힐베르트 등)와의 교류를 통해 이론을 끊임없이 수정하여 1915년 11월에는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하고 일반 상대성 이론 또한 마무리지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상대성 이론 체계를 완성하였고, 이후 중력파, 우주론 등과 관련하여 슈바르츠실트, 드지터, 슈뢰딩거 등 몇몇 물리학자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이어나갔으며 특히 철학적 함의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19년 런던 왕립 학회의 지원을 받은 에딩턴의 개기일식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단숨에 세계구급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영국(뉴턴)과 독일(아인슈타인)의 화합을 상징하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수상 근거는 "이론 물리학에 대한 공로,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for his services to Theoretical Physics, and especially for his discovery of the law of the photoelectric effect)이었다. 수상식 연설문에 의하면 "이론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 브라운 효과, 그리고 광전 효과 세 가지였다.[[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1921/ceremony-speech/|#]][* 1919년 이혼소송 당시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자녀 양육비로 첫 번째 부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에게 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상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수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극동 여행을 떠나 있어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